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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릴's 신앙

불상에 절한다는 것. -NEWS & JOY-

“종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언급은 주장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며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이상도 아니다. 그것은 소박하게 우리 앞에서 벌어진 현실에 대한 묘사다. 특정 종교의 자기주장에 ‘아니’라고 선언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가 바라보는 한국의 다종교의 현실에 대한 기독교의 맹목적인 배타성에 대한 일갈이다. 새삼스러운 지적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를 ‘진리’로 바꾸어 읽으면 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은 다종교의 현실에서는 당연한 것이라는 거다.

이 당위성을 진리 대 반진리의 대립으로 몰고 가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종교전쟁을 하자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불자들에게 불교는 진리일 것이며,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가 진리일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놓고 누구의 것이 진리인지 따져보자고 덤벼들게 되면 대책이 없다. 어느 누가 이 문제에 정확한 논증과 더불어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신(神)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판결을 아주 쉽게 내리는 곳이 있다. 종교 인구의 수적인 우세를 배경으로 배타성을 넘어 타종교에 대해 적대시와 폄훼는 기본이고 그들의 신상을 파괴하는 것을 거룩한 신의 사명으로까지 생각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그 어떤 종교를 신앙하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종교적 자유이며 그 자유는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종교가 귀하면 타자의 종교도 귀하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만큼이나 지극히 상식이며 진리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 배타성, 그것이 타 종교에 대한 적대적 시각을 갖게 하는 가장 핵심 요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경중의 문제일 뿐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가 진짜 진리임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타종교에 관념적 비판을 넘어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서 그것을 적대시하는 행위는 기독교의 선교에는 물론이고 기독교의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교리적 문제를 놓고 논쟁을 여기서 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짓일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배타성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학적 종교적 논쟁으로 그것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는 이찬수 교수의 사안을 일방적으로 판결 내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불상에 절하면 배교 행위인가

문제는 이것일 것이다. 이찬수 교수가 성직자이면서 어떻게 타종교의 신상에 절을 할 수 있는가, 이것에 기독교는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분명 보이는 현상만 보자면 배교 행위다. 그래서 대학 측은 성직자의 자격은 물론이고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을 훼손시켰으니 교수로서의 자격 또한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임용 거부했다. 임용 거부의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는 그것대로 따지면 될 터, 그것은 법률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이왕 임용 거부의 이유가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를 두었으니 그것을 한번 따져보고자 한다.

교리적인 이유가 잣대라면 그것 또한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배타성이 교리적 근거라고 해도 말이다. 자, 그럼 이찬수 교수가 불상에 절한 것이 기독교의 진리 어디에 반하는 배교 행위인지 따져보자.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십계명에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인정한다. 그렇다면 십계명 중에 그 하나만 지키면 그리스도인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머지 아홉의 계명은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 하나만 잘 지키면 없어도 되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아홉의 계명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있다. 어쩌면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계명을 범할 수 있다는 모순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웃을 살리고자 우상을 숭배한다면, 아니 배교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에 어느 누구도 답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가 우리의 현실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삶의 문제다.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달려오는 과속차량으로부터 어린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도로로 뛰어들을 때 그가 도로교통법을 어겼다고 그를 비판하는 정신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느 것이 그 상황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양심의 문제다. 이찬수 교수의 행위가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보자면 불상 앞에 절한 행위이니 우상숭배이지만 그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그랬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그가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그리했다면 그는 기독교 교리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도덕에도 반하는 행위를 했기에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용을 보여주자는 의미로 갈등과 대립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의한 행동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불상 숭배를 했다는 것을 넘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찬수 교수의 불상에 절한 행위를 일제식민지 하에서 신사참배를 한 것과 비교해서 비판을 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신사참배가 일본의 종교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면 모를까 그것은 일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교수가 불상 앞에 절하면서 자신의 기독교를 비난하면서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을 했으면 모를까 그는 여전히 지금도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그의 행위가 기독교적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비교다.

그는 자신이 불상에 대해 예를 표한 것은 단군 신상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기독교의 배타성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마음과 이 교수가 신앙하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은 관용과 사랑이라는 자신의 평소 신학적 이론을 몸소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비난을 각오하고 말이다.

행위에 대한 충분한 논쟁 필요

물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 이 교수의 행위가 과연 적절했는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논쟁이 기독교는 물론이고 타종교와 공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학문적 논쟁은 고사하고 단칼에 정죄하니, 타종교와 공존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기독교는 점점 고립되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 불상에 절하면 안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기독교가 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지,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기독교계가 그렇게 우려하는 이찬수 교수 같은 신앙인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신기한 것은 기독교에서는 엔도슈샤쿠의 <침묵>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일본에서 선교를 한 외국인 선교사 신부가 끝내는 배교한다는 내용이다. 이 배교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자신의 생명을 위한 배교가 아니라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을 살리기 위한 배교라는 것이다. 일본인 관료는 기독교인들에게 성화에 침을 뱉고 그것을 밟으면 살려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아름다운 순교를 택한다. 이 신부도 잡혀 와서 똑같은 제안을 받는다. 그러나 신부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순교를 택한다. 그런데 그 관료는 고통스러운 제안을 한다. 신부가 성화를 밟으면 여기에 잡혀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석방하겠다는 것이다.

신부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순교함으로서 거룩한 순교자의 반려에 오를 것인지, 아니면 저들의 죽음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은 배교를 할 것인지, 결국 신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성화를 밟는다. 그 성화를 밟는 그 고통, 그것은 그 신부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밟으면 신부는 배교자가 된다. 하지만 저들을 죽음에서 살려낼 수 있다. 아니 저들 중에서 죽음이 무서워 배교하는 자까지도 배교하지 않게 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해 성화를 밟는다.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망설임·불안, 그것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신부, 차라리 순교가 더 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는 고통스럽게 성화를 밟는다. 그때 음성이 들린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 신부의 배교는 타자를 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배교를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그는 하나의 계명을 어겼다. 자, 누가 그 신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며, 어느 누가 진정 그 신부가 그리스도를 배신했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이찬수 교수의 불상에 절한 행위가 교리를 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으로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런 그를 정죄할 권한은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신(神)만이 그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신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종교는 욕망이 있다. 그러니 자신의 종교가 ‘진짜 진리’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신(神)이 아니다. 그래서 신(神)이 되려고 예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죄없는 자만이 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신다. 내가 진리라는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양심은 있었던 것 같다. 돌을 놓고 사라졌으니 말이다.

우린 여전히 돌을 놓지 못하고 있다. 내 잣대가 불변의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간음한 여인을 돌로 죽여야만 놓을 것인가?